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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마법사-글자-위로-주디-마법사-사자-허수아비-양청-나무꾼이-함께-나란히-보이는-사진

어린 시절 TV로 화려한 마법사와 이상한 나라의 사람들을 무척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입니다. 지금의 CG나 편집 과학적 촬영 기술이 전무했던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재미있는 비주얼과 이야기로 여전히 감동을 주는 판타지 뮤지컬 명작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할리우드가 낳은 고전 중의 고전

1937년 월트 디즈니가 동화를 영화로 만든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대 히트를 치자 이를 본 엠지엠(MGM : Metro Goldwyn Mayer 미국의 영화 제작사)에서 디즈니에 맞서서 만들었던 실사영화가 오즈의 마법사입니다. 당시 특수효과, 호화 배우, 수많은 제작진을 비롯하여 지금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영화로 손색이 없었죠. 그러기에 제12회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면서 'Over the Rainbow'는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명곡으로도 유명합니다.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는 <오즈의 마법사>를 비롯하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노트르담의 꼽추>, <역마차> 등 여러 명작들과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보이던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는 작품이네요. 오즈의 마법사는 흥행에는 실패 했지만, 당시 전쟁과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미국 사회에 희망과 위안을 안겨 주는 문화적 공로를 인정받아서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됩니다.

바람과 함께 오즈의 나라로 간 도로시

미국 캔자스라는 시골 마을에 호기심 많은 소녀 도로시(주디 가랜드)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회오리 바람에 강아지(토토)를 구하려다 휩쓸려 오즈의 나라로 가게 됩니다. 도로시는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위대한 오즈의 마법사가 알고 있다는 것을 남쪽나라 착한 마녀 글린다를 통해 알게 되고, 그를 찾기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됩니다. 도로시는 토토와 함께 오즈의 마법사(프랭크 모간)가 사는 에메랄드 시티로 향하는 중에 세 명의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두뇌가 없어 지혜을 얻고자 하는 허수아비 헝크(레이 볼거)와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 히커(잭 할리), 용기가 부족한 겁쟁이 사자 지크(버트 라)와 함께 오즈의 마법사에게 자신의 소원을 부탁하기 위해 도로시와 함께 향하게 됩니다. 결국 도로시는 캔자스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됩니다.

한 번씩은 들어 본 Over the Rainbow

앙꼬(팥) 없는 찐빵, 단무지 없는 김밥은 상상하기 힘들 듯이 "Over the Rainbow" 노래가 없는 오즈의 마법사는 상상하기 힘들지요. 베스트 오리지널 송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이 노래는 사실 이 영화에서 삽입 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영화 제작 당시의 시사회를 마치고 MGM 간부들이 영화의 분위기와 맞지 않다고 하여 삭제할 것을 요구했으나, 부제작자인 아서 프리드의 강력한 요청으로 결국 지금 들어도 멋진 명곡으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화려했던 모습 뒤의 혹사당한 도로시의 인생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1922년 태어난 주디 갈랜드(도로시)는 가수 겸 배우로 아주 어린 2세부터 노래를 부르기 사작였습니다. 13세(1935년)에 제작사 MGM 오디션에 합격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녀의 스타로서 삶과 불행이 함께 시작됩니다. 주디 갈랜드는 영화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 역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정작 제작자들은 그녀에게 억지로 각성제와 수면제를 먹이면서 12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몸매 관리로 식욕을 줄이기 위해 흡연을 강요받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해야 할 시기에 체중조절을 위해 수프만 먹기도 했죠. 딸의 성공을 위해 어떤 일이라도 마다 하지 않았던 주디 갈랜드의 어머니는 심지어 남성 프로듀서들에게 성접대를 강요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았던 귀엽고 청순하고 발랄한 소녀의 이미지를 가졌음에도 영화 관계자들은 그녀의 외모는 평범하나(섹시하거나 아주 예쁜 얼굴 외모가 아닌)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배우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주디 갈랜드는 평범한 외모로 인한 낮은 자존감 때문에 평생을 열등감과 약물중독, 애정 결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본인의 열등감을 채워줄 남자로 인해 다섯 번의 결혼을 했지만, 쓸쓸한 마음을 채우고 위로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네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던 주디는 1969년 다섯 번째 남편인 12세의 연하 미키 딘스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3개월 후인 1969년 6월 47세의 나이에 약물 과다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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